1. 소비를 ‘기록’하는 순간, 숨겨졌던 습관이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내가 얼마나, 무엇에, 어떻게 돈을 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일주일 동안의 소비를 기록해보기로 했다. 작은 금액 하나도 빠짐없이 적었다. 2,500원짜리 편의점 커피, 4,900원 하는 모바일 게임 결제, 3,000원 배달앱 쿠폰… 그렇게 적다 보니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잘한 소비가 쌓이고 있었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냥 스쳐 갔을 돈들이었다. 하지만 적어보니 그 소비는 ‘행동’이었고,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특히 눈에 띈 건 감정과 연결된 소비였다. 지치거나 우울할 때 무심코 하는 디저트 배달, 심심할 때 하는 앱 내 유료 결제, 그리고 ‘오늘은 나한테 주는 보상이야’라는 핑계로 한 쇼핑몰 장바구니 결제. 분명 소비는 했지만,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히려 ‘왜 그걸 샀지?’라는 자책만 남았다.
기록은 마치 거울 같았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소비를 하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소비를 추적하자, 나도 몰랐던 ‘무의식적 소비 성향’이 드러났다. 그동안 막연하게 ‘나 돈 좀 많이 쓰나?’라고 느끼기만 했다면, 이제는 어디에 쓰고 있었는지 왜 쓰고 있었는지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2.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인 줄 알았지만, 실은 ‘보상 소비’형이었다
나는 꽤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세일을 노리고, 적립도 잘 챙기고, 가격 비교도 빠삭하게 하는 스타일이니까. 그런데 일주일 동안의 소비 내역을 다시 보며 그 생각이 조금씩 무너졌다. 숫자로 보면 나는 분명히 '똑똑하게 사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소비의 동기를 살펴보니 이야기가 달랐다.
퇴근 후,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사는 커피. 약속이 취소된 날, 마음이 허전해서 결제한 인터넷 쇼핑. 바쁜 하루를 마치고 느끼는 ‘보상 심리’에 휘둘려 지출이 늘어나는 날이 많았다. 특히 일과 감정이 힘든 날일수록 소비가 더 많아졌고, 사는 이유가 ‘필요해서’보다 ‘기분 풀려고’였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누구에게나 보상 소비는 필요하다. 다만 문제는, 이 보상 소비가 일상적 습관으로 굳어져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소비는 ‘진짜 회복’이 아니라 순간의 기분 전환에 불과했다. 소비 이후 마음이 편해지기보다 찝찝함이 남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나 자신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은 마음의 공허함을 덮는 방식으로 소비를 쓰고 있었던 거다.
이걸 깨달으면서 나에게 진짜 필요한 보상은 '돈 쓰기'가 아니라 ‘회복 시간’과 ‘감정 돌봄’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소비보다 차라리 산책이나 독서, 또는 친구와 대화가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걸 말이다. 일주일의 소비일지는 내 소비의 목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나침반 같았다.
3. 작은 습관 하나가 큰 소비를 만든다
소비 내역 중 가장 놀라웠던 건, 큰 금액의 결제보다 ‘매일 반복되는 소액’이었다. 하루 5,000원씩 써도 일주일이면 35,000원, 한 달이면 15만 원이 넘는다. 특히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소비들, 예를 들면 출근길 커피, 점심 후 디저트, 자기 전 쇼핑 앱 둘러보기 같은 습관은 쌓일수록 지출을 크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눈에 띈 소비 습관은 시간과 장소에 따른 반복 패턴이었다. 특정 시간대나 특정 장소에서 늘 비슷한 소비를 하고 있었던 것. 예를 들어 퇴근길 지하철 내에서 쇼핑 앱을 열거나, 주말 아침마다 카페에 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 행동 자체가 이미 루틴처럼 굳어져 있었다.
사실상 그 소비는 ‘필요에 의해’ 일어난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돈을 쓰는 구조에 내가 놓여 있었다는 뜻이다. 한 번 익숙해진 소비 루틴은 생각보다 끊기 어렵다. 하지만 일단 인지하고 나면, 조금씩 대체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출근길 커피를 집에서 내려서 가져가 보기, 쇼핑 앱 대신 뉴스레터 읽기 같은 작은 전환들.
무작정 지출을 줄이려는 다짐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의 반복되는 소비 습관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게 바로 타성적인 소비를 줄이고, 진짜 필요한 곳에 돈을 쓰는 시작점이 되어준다.
소비일지를 쓰기 전까지 나는 늘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가성비 따지고, 리뷰 비교하고, 필요 없는 건 과감히 걸러내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내가 직접 써 내려간 소비 내역을 다시 읽어보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물건 하나하나를 샀던 이유는 꽤 논리적이었지만, 그 소비들이 과연 나와 어울렸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한 번 입고 안 입게 된 트렌디한 옷, 유행이라는 이유로 샀지만 영 감흥 없던 인테리어 소품, 혹은 남들 다 좋다기에 가입한 구독 서비스들. 이 모든 소비에는 '나다움'이 없었다. 그저 남들이 좋다 하니까, 지금 이 타이밍에 사야 손해가 아니라니까, 혹은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많이 봐서 자연스럽게 손이 간 선택들이었다.
반대로, 내가 자주 쓰고 오래 사용하는 물건들은 오히려 단순하고, 눈에 띄지 않고, 때로는 누군가는 "왜 이걸 아직도 써?"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오래된 낡은 가죽 백팩, 묵직한 촉감이 좋아서 매일 쓰는 펜, 5년 전에 산 데일리 신발 같은 것. 이들은 유행도, 누군가의 추천도 아니었지만, 늘 나와 함께였다.
그때 알았다. 정말 좋은 소비는 내 취향과 리듬,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생긴다는 걸.
즉,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선 나다운 소비는 절대 할 수 없다는 것.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소비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 이제는 단순히 “싸다, 예쁘다, 요즘 인기다”를 기준 삼기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먼저 던진다.
이건 내 일상에 잘 어울릴까?
내가 자주 쓸 수 있을까, 아니면 한두 번 쓰고 말까?
이 소비가 일시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내 만족에서 출발한 선택인가?
그 질문들을 지나고도 ‘그래, 이건 진짜 나를 위한 거야’라고 느껴지는 소비는 대부분 오래도록 후회가 없다.
한 가지 재미있는 변화는, 소비 속도가 느려졌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결제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일단 ‘바구니에 담기’만 해둔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들여다보면 꽤 많은 물건이 “굳이?”라는 생각으로 빠져나간다.
이건 단순히 절약이 아니다. 불필요한 소비를 덜어내면서 ‘진짜 나다운 소비’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만의 기준이 생기고, 거기에 따라 물건을 고르기 시작하자 이상하게도 소비 후에 느끼는 죄책감이나 아쉬움도 줄어들었다.
나를 닮은 소비, 나를 위한 소비는 단순히 물건 하나를 고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의 태도, 가치, 그리고 자존감과도 연결된다.
예전에는 소비를 통해 뭔가를 ‘채우려’ 했지만, 지금은 소비를 통해 내 삶을 정돈하고 다듬는다는 느낌이 더 크다.
이제 나는 소비를 '비우는 일'이 아니라 '선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작정 절약하기보단, 진짜 나와 잘 맞는 것들을 골라내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
그래서 한동안 일기를 쓸 때마다 내 소비를 돌아보는 시간을 일부러 넣고 있다. "이번 주 가장 만족한 소비는 무엇이었지?"라고. 그 질문은 단순한 쇼핑 회고가 아니라, 내 삶의 우선순위와 나다움을 점검하는 순간이 된다.
요약하자면,
“좋은 소비란, 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선택이다.”
그 선택이 곧 내 일상의 결을 만들고, 결국 나라는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